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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으로 비상하며 놓친 것들에 관하여

읽점 2012. 6. 7. 11:45

반값으로 비상하며 놓친 것들에 관하여


임시걸 joyful.editor@gmail.com



필리핀 세부로 패키지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주로 호텔 안에서 쉬고 놀고 먹고 하다가 중간중간 스노클링 등의 활동을 하기 위해 밖으로 가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완벽한 환상의 공간인 호텔을 벗어나 허술한 트럭에 실려 해안가의 다른 관광지로 이동하는 동안, 그곳 주민들이 사는 거리를 지나는 것은 당연하다. 호텔 안과 밖의 엄청난 차이에,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 탄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동네 아이들은 흙바닥에 나무로 지은 집 안팎에서 놀다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차에 동승한 젊은 엄마와 아이의 대화는 안 그래도 여행 내내 불편했던 내 마음을 휘저어놓았다. 

“OO야, 저 사람들 보니까 어때?” 

“불쌍해요.” 

“왜?” 

“더러운데, 장난감도 없고, 위험한 데서 놀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마음이 들어?” 

“도와주고 싶어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 돈을 줘요.” 

헉. 창밖을 보는 척 귓등으로 듣고 있다가 입이 쩍 벌어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다음 순간 옆에 있던 그의 오빠, “안 돼! 그냥 주면 안 돼. ..... 환전해야 돼!” 이 말에 차에 타고 있던 이들 모두 파안대소를 하고 말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의 삶을 불쌍하고, 더럽고, 안 됐다고 인식하는 그 아이와, 자식을 이렇게 베풀 줄 아는 아이로 키우려 애쓰는 그 어머니, 그리고 ‘문제’라고 인식된 그것에 대한 해답으로 ‘돈’을 주는 것밖에는 다른 방식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이렇게 훈훈하게 소통되는 이 아연한 현실이라니. 부자연스러운 것은 필리핀의 그들이 아니라, 거짓 낙원을 꾸며놓고 남의 땅에서 즐기고 있는 우리인데.


반값수양회가 결정되고 그것이 동문들에게 알려지는 상황을 보면서,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위의 대화가 기억났다. 그 대화에서 내가 불편했던 것은 대략 세 가지였는데 첫째로, 필리핀의 그 사람들의 삶이 정말로 비참한가, 즉 이것이 정말 ‘문제’인가 하는 점, 둘째로는 ‘불쌍한 그들-여유롭고 너그러운 우리’라는 프레임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 실상은 ‘빼앗긴 그들-빼앗은 우리’라는 프레임으로 보아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물론 전자가 후자보다 당연히 ‘우리’를 덜 불편하고 더 너그럽게 한다), 셋째로는 그 해결 또는 변화를 위한 방식이 돈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반값수양회 논의에서 내게 껄끄러웠던 지점은 비슷했다. 첫째, 수양회비가 정말로 너무 비싼가, 둘째로는 ‘돈 없어서 수양회도 못 가는 가련한 학생들-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에 무엇이든 해주려는 넉넉한 선배들’의 프레임이, 학생들을 선배들의 은혜를 일방적으로 받아 누리는 수동적인 자리에 두는 것은 아닌가, 셋째로 동문들은 혹시 ‘돈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부모’처럼, 후배들을 위해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돈밖에 없는가.


수양회비가 비싸긴 하다. 이건 사람마다 체감이 다르겠지만, 중고등부 시절 교회 수련회를 1~2만원씩만 내고 다니다가 대학교에 와서 선교단체 수련회비가 십만 원에 육박하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사회 진출 10년이 넘은 지금도 일시불로 지출하기엔 여전히 심장 떨리는 금액이다. 하지만, 조금 꿀꿀한 날 기분전환을 위해 십만 원씩 쓰는 학생들도 있다. 학교 앞 깨끗하고 분위기 좋은 음식점들, 펌이나 염색, 영양 등등 고차원적으로 머리 손질하는 비용, 새로 나온 운동화, 철 바뀌며 나오는 신상 옷들, 맛 들이면 무서운 커피 도구들, 잡스 형님의 마수에 빠져 덜컥 사버린 첨단 기계들과 그 액세서리들. 어쨌거나, 선교단체에는 전자와 후자가 다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수양회비가 절대적으로 비싼가 안 비싼가보다 중요한 건, 그 비용이 합리적인가 하는 점이다. 수양회비가 너무 비싸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신입생 시절의 나에게, 선교단체는 교회와 달리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회비로 모두 충당해야 하고, 그럴 때 이러저러한 비용들로 인해 그 금액이 나왔다고 간사였는지 선배였는지 누군가 설명해준 이후로, 수양회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회비는 내 마음에 떨림의 잔물결을 일으켰지만 나는 그 금액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둘째, 왜 선배들이 후배들을 ‘책임’지려 하는 걸까. 어른이니까, 좀 더 상황이 나으니까,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사실은 선배들이라서..? 틀리진 않다. 하지만 여기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그러나 나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차이가 있다. 밤늦은 시간 지하철에서 술 취한 아저씨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보며 과연 해결책은 ‘남친의 도움’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회의에 빠질 뻔했다. “오빠 믿지?”의 문화, 나이 많고 힘 세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의 배려와 보호로만 약자가 생존할 수 있다는 착각, 그래서 약자들은 강자들이 베푸는 은혜를 익숙하게 받아 누리는 이 문화는 절대 진리가 아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문화다. 

전쟁을 없애자는 반전 평화뿐 아니라 일상적 수준에서의 평화, 적극적이고 구조적인 평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평화 만들기 101>에 소개된 다음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케냐에서 열렸던 한 회의에서 나는 처음으로 강직한 아프리카 여성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국제 경제 시스템의 식민지적 억압과 끊임없는 여성 폭력 문제의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명료하게 밝혀냈다. 그때 부유한 북반국의 나라에서 온 한 여성이 남반구를 위해 기금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여성들은 침묵했고 분명 언짢아 보였다. 결국 한 여성이 “여기서 우리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게 내버려두세요. 고국으로 돌아가 당신의 나라가 우리를 가난과 비참함으로 내몰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고 그것을 바꾸려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내 조국을 포함한 북반구의 많은 나라가 개발도상국들을 부채의 고통 속에 허덕이게 만드는 구조들을 모두 알아내는 데 나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호주의 원주민 시인, 릴라 왓슨Lila Watson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돕기 위해 왔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함께 걸어갈 수 있소”라고 말했다.

- 메리 와인 애슈포트, 기 도운시, <평화 만들기 101>, 103~104쪽.


“Solidarity, not charity.” 자선이 아닌 연대를. 자선과 연대는 다른 프레임을 요구한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는 프레임 대신,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너와 내가 무관하지 않기에 얽힌 실타래를 푸는 일에 함께 매달린다는 프레임을 가질 때, 캠퍼스를 벗어난 동문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쁘게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반값수양회, 좋다. 그런데 방법이 ‘선배들의 후원’밖에 없었을까? 앞서 말했듯, 수양회비는 나름 빠듯하게 알뜰살뜰하게 책정된 금액이다. 참석 인원은 매번 예상보다 적고, 적자를 줄이기 위해 집행부는 식사비, 숙소비 등에서 학교 측과 협상하느라 진을 빼는 한편, 수양회에서 유일하게 수익을 내는 판매부는 책과 간식 판매에 사활을 건다. 간식? 흠.......... 이윤을 남기기 위해 “먹지 마, 독이야!”인 줄 알면서도 밤새 간식 세트를 만들고, 열심히 판다. 수양회 내내 참가자들은, 엉덩이가 뻐근하도록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듣고 또 듣다가 졸지 않도록 달달한 간식 세트를 사먹고 사랑하는 후배에게 사준다. 이번 수양회에서도 이 패턴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수양회비를 덜 낸 만큼 더 많이 사먹고 사줄 수 있으려나?

반값수양회를 기획하면서, 뭔가 다른 접근을 시도할 수는 없었을까? 합리적으로 산출됐지만 체감의 충격이 있는 수양회비의 절대금액을 낮추기 위해, 매일 점심을 금식 기도회 시간으로 바꾼다거나(이런 건 사전 유출 절대 금지 사항!), 깊은 친밀감을 형성하도록 3인실인 학교 기숙사에 10인씩 수용한다거나(이것도 사전 유출 절대 금지!), 외부 강사를 초청하지 않고  수양회 주제를 온 몸으로 살고 있는 동문들이 강사로 선다거나, 학생들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거나 하는 ‘합리적인 반값’ 수양회를 모색할 수는 없었을까?

수양회 참가자들은 그저 “선배들이 도와주셔서 수양회비가 이렇게 내려갔습니다!” 하는 진행자의 설명을 듣고, “와~ 감사합니다! 박수 짝짝짝짝” 정도의 반응을 하고, 어쩌면 아주 양호하게 ‘나도 졸업하면 돈 많이 벌어서 후배들 도와줘야지’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 그런 기획이 전부는 아니었을 거다. 물론. 절대로. 

 

나 역시 당사자는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캠퍼스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보다는 장(場)이다. 부모와 선생과 교수와 상사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며 사는 길을 벗어난 적 없는데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장애물을 만난 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감면이나 혜택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고 자기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공간이다. 수양회는 그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선배들의 애정 어린 연대로 예년보다 가볍게 수양회라는 장으로 들어온 참가자들이, 돈 너머에 있는 보물들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수양회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세심한 기획으로 그 장이 확보되기를, 풍성하고 활발한 장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