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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평화를 창조한다 - 위르겐 몰트만

읽점 2008. 8. 25. 14:52

안전이 아니라 정의가 평화를 창조한다

성서의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신앙체험은 오로지 정의만이 지속적인 평화를 창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당한 행위와 폭넓은 정의를 위한 배려 이외에 평화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 모든 그리스도교적 사고는 정당하게도 이러한 명제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유태인과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에 정의를 가져다주기를 원할 경우 항상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체험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올바름과 공정함을 창조하는 정의로서 체험한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하나님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에게 권리를 찾아주시고, 불의에 처한 인간에게 정의를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편 31:2와 함께 “당신의 정의로써 나를 구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으며, 시편 146:7은 “폭력으로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소서”라고 고백한다. 바로 이러한 정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샬롬”이라는 평화를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불의와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질서와 평온이 강요될지언정 평화란 없다. 평화가 정의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평화를 가능케 한다. 불의는 항상 불평등을 초래하고 균형을 파괴한다. 불의의 체제는 폭력으로써만 유지된다.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는 평화란 없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만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유태교, 그리스도교적 정의 개념을 우리 시대 법률문화의 정의 개념과 비교해 보자.

가) 유럽 법률문화의 오래된 개념은 정의를 각자 자신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 준다(suum cuique)는 의미의 분배정의(iustitia distributiva)로 이해했다. 이 천재적 공식은 모든 이의 평등권을 인간의 현실적 상이성과 연결시킨다. 즉, 각자에게 각자가 자기 능력과 필요에 따른다는 것이요(마르크스), “각자가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레닌). 하지만 이러한 정의 개념은 모든 인간은 생명과 식량, 노동과 자유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의 능률과 재화에 대한 실용적 관계를 너무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나) 이러한 실용적 정의개념 외에도 인간적인 공동체를 낳는 인격적 정의 개념도 있다. 이 인격적 정의개념은 인간의 상호존중과 타인의 인정에 근거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상호존중과 인정은 하나의 정의롭고 인간적인 공동체를 창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로마 15:7)라는 그리스도교적 체험과 일치한다. 이러한 인격적 정의 개념은 국제연맹 규약이나 헌법 등 민주사회를 촉진하는 개념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다) 그러나 정의의 최고 형태는 권리를 상실한 자들에게 권리를 되찾아주는 자비의 법이다. 이 정의는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의 정의이다.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주장하듯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구조를 창출한다. 이것은 은총이 권리에 앞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권리를 상실한 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불의한 자들이 정의에도 개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법질서 외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 지속적인 평화를 가능케 하는 모든 법질서를 위한 권리 창조의 원천이다. 타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 못지않게 가난하고 허약하고 병든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창조하는 것 역시 항구적인 법질서를 가능케 하는 바탕이기도 하다.

: 평등보다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항구적 평화로의 길

성서의 전통과 유태교,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체험은 포괄적 평화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샬롬”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 전체가 모든 관계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웃 그리고 다른 피조물과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 즉 하나님과의 평화, 인간들끼리의 평화 그리고 자연과의 평화 속에 살아가는 생명은 축복받은 생명이다. 인간은 이러한 평화를 하나님을 구실삼아 종교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개선시킬 수는 없다. 평화는 보편성과 영속성을 지향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유태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역사를 통해 체험한 것은 모든 피조물을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하나님 평화의 시작과 선참이다. 유태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든 민족과 창조물을 위한 구체적인 평화를 희망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역사 안의 평화는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며, 소유가 아니라 공동의 길이다. 평화란 폭력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다.

평화연구에서는 흔히 평화의 소극적 정의와 적극적 정의를 구별한다. 소극적 정의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 즉 군사력의 사용과 불안과 억압의 부재를 의미한다. 평화에 대한 이러한 소극적 이해는 지난 40년간 핵위협체제가 “평화를 보장”해 왔다고 말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할지라도 소극적 의미의 평화는 휴전과 혼동되고 있으며, 핵위협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된 비용은 비밀로 남아 있다. 이처럼 평화에 대한 소극적 정의에 쉽게 의견의 접근을 보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평화의 적극적 정의는 사회적 정의, 갈등의 민주적 조정 그리고 모든 이의 항구적 진보의 균형 상태를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요인을 배제하고서는 평화의 소극적 정의가 작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적 평화 개념은 이러한 양자의 정의를 연결시킨다. 하지만 정의를 강조함으로써 평화의 적극적 정의를 우선시킨다. 그러므로 역사 안의 평화는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는 공동의 길이다. 이러한 공동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준비와 폭력의 제거, 그리고 신뢰와 공동체성의 건설이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항구적 평화는 현재의 세대를 위해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세대 간의 정의를 위한 책임에서 항구적 평화는 발생한다. 인류는 세대의 연속으로서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세대는 앞선 세대의 채무자이다. 아울러 모든 세대는 다가올 세대의 삶을 위한 책임을 지고 있다. 불문율인 인류의 세대계약 안에서의 정의만이 항구적 평화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의 평화란 결코 인간이 안심할 수 있는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항상 인류에게 시간을 연장시키고, 다가올 세대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의 길이다.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직면하여 오늘날 예수의 산상설교가 공개토론의 대상으로 등장하는데, 산상설교의 주요 관심사는 특히 폭력에서의 해방과 적대감의 극복이다. (중략)

하나님의 생명의 지혜인 메시아는 평화를 가져오고, 폭력을 극복한다. 이로써 악뿐만 아니라 동시에 악을 악으로 보복하는 법칙, 폭력행위뿐만 아니라 동시에 폭력저항을 통한 폭력의 제한까지도 파기되었다. 비폭력행위와 선을 통한 악의 극복이야말로 메시아적 세계를 특징짓는 표징이다. 오로지 창조적 사랑 안에 존재하는 정의만이 항구적 평화를 세상 안에 가져다준다.


원수를 위해 책임을 져라

“원수사랑”은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 의하면 가장 완전한 이웃 사랑의 형태이다. 동시에 가장 완전한 정의의 형태이기도 하다. 원수사랑은 이 땅 위에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는 첩경이다. 싸움에 휘말려 들고 갈등을 야기하는 자는 항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법칙에 사로잡힌다. 원수에게 이러한 복수의 법칙을 책동하는 자는 아무런 탈출 가능성이 없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그 결과 적대감은 고착된다.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악은 항상 또 다른 악을 찾아 나서게 된다. 악은 악을 통해서만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한쪽 눈과 빠진 몇 개의 이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핵시대에 와서는 외눈과 빠진 이에 해당하는 군비경쟁과 위협적 대량보복은 세계를 보편적인 죽음으로 몰고 간다. 오로지 원수에 대한 정향이 중지되고 복수의 위협을 통한 협박이 통제될 때 비로소 생명에 대한 해방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위협의 자리에 대체시키는 원수에 대한 태도는 원수사랑이다(마태 5:43이하 참조). 핵시대의 조건 아래에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수사랑은 복수하는 사랑이 아니라 창조적인 사랑이다. 악을 선으로 극복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반작용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새로운 무엇을 창조해낸다. 원수사랑은 원수에 대한 주도권을 전제로 한다. 원수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될수록 원수사랑은 더욱더 성공한다. 원수사랑은 결코 원수에게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적대감의 확인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원수사랑이 원수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원수사랑은 적대감을 창조적으로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다. 원수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원수와 원수의 공격에 대해 어떻게 나를 방어할 수 있을까를 묻지 않고, 오히려 내가 어떻게 원수의 적대행위를 수용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원수사랑을 통해 우리는 원수를 우리의 책임 안으로 받아들인다. 동시에 타인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인식할 줄 알게 된다. 원수사랑은 선의의 추상적 표현이 아니다. 즉 막스 웨버가 지적하듯이 “지향윤리”의 표현이 아니다. 그 대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책임의 표현, 즉 “책임윤리”의 표현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 원수사랑의 실천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핵시대에 있어서 원수사랑은 정치적으로 볼 때 유일하게 합리적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원수를 절멸시키거나 이 절멸로 원수를 위협함으로써 평화를 정착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적대감을 제거하고 공동의 안전과 항구적 발전을 위한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 인류가 처음으로 공동 대처하는 시대에 있어서 정치는, 타인의 개성을 더불어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다양한 감정의 이입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서유럽이 어떻게 러시아의 위협을 방어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서유럽과 동유럽에 어떻게 공동의 평화질서를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적 의식과 정치적 사고를 탈군사화해야 하고 적과 나누는 민주적 친교를 “원수”와 나누는 국제적 친교의 차원에로 전이시켜야 한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권력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산상설교만으로는 어떤 국가도 통치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핵시대에 산상설교를 배제하고서는 생존의 정치가 불가능하다. 산상설교로써 비로소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평화의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비폭력을 통한 폭력의 극복

원수를 사랑하는 정치에서 폭력의 지배를 비폭력적으로 극복하는 정치가 창출된다. “비폭력”이란 탈정치화 또는 권력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권력과 폭력을 구별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을 힘의 올바른 사용으로 이해하고, 폭력을 권력의 부당한 사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국가는 사회 안에서 “힘의 독점”을 행사하는 것이고, 우리는 힘이 불법적․위법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며 행사될 때, “적나라한 폭력”, “잔인성”, “폭정” 등에 대해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시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힘의 문화”를 제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정당한 책임에 입각한 모든 힘의 사용을 촉구해 왔고, 특히 국가가 폭력을 사용할 경우 더욱더 그러해 왔다. 그리스도교는 니체가 숭배한 “야수의 무죄”를 파괴했다. 법 역시 국가의 힘의 독점에 제한을 가하고, 이 제한은 자국민에 대한 국내정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 또는 인류에 대한 외교정치에도 해당한다. 핵의 대학살을 동반하는 인류의 위협은 어떤 무엇을 통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잔인한 폭력행위이다. 핵무기의 위협과 사용, 기타의 대량학살 수단은 모든 국가의 권리를 벗어난다.

폭력을 극복하는 첫 번째의 형태는 모든 권력의 행사를 권리와 연계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힘의 행사는 그것이 위법적이거나 불법적인 것이든 또는 인권을 겨냥하는 것이든 모든 불의한 권력행사에 대한 저항의무를 발생시킨다. 비폭력의 원리는 권력의 투쟁─이 투쟁에서 힘을 권리에다 연계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될 경우─을 배제하지 않는다. 권리의 회복과 억압받는 자의 권리를 위해 투신하면서 폭력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은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

폭력의 지배 아래 시달리는 국민의 힘은 테러가 아니라 연대성이다. 테러는 해방의 목표를 실추시키고, 폭력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준다. 국민과 민족의 대중적 연대성은 피상적으로는 권리처럼 나타나는 폭력의 지배를 정지시키고, 폭력의 위협과 공포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근래에 포르투갈․스페인․그리스․아르헨티나․필리핀 등지에서 국민들이 군사독재를 무혈적인 방법으로 극복하는 실례를 목격했다. 폭력의 지배는 국내정치적으로는 국민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외교정치적으로는 타민족에 의해 고립되어, 폭력의 지배가 내포하고 있는 공포가 무력하게 되고 폭력의 지배에 대한 신뢰가 거부될 경우 그 기반은 허약할 수밖에 없다.

폭력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그것은 순교를 요구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적극적인 행위만이 해방하는 힘이 있어 성공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고통 역시 그 자체 해방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더구나 장기적으로는 설득력 있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평화를 위한 투신은 항상 비폭력적 행위와 개인적 희생의 각오를 포함하는 개인적 책임을 요구한다.

- 지방 교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를 경청하고 순종한다면, 그들의 삶의 공동체로 변모될 것이다. ......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이란 창조물의 총체적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질병을 치유해야 할 과제를 더욱더 깊이 인식할 것이다.

- 교회의 모든 조직형태에 “사고는 우주적으로, 행위는 지역적으로”라는 모토가 적용되어야 한다. Think universal, Act local........ 교회가 오로지 지역교회, 지방공동체, 평화운동의 모든 차원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공동의 학습과정을 위해 투신할 때만이 하나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목소리는 경청될 것이다.



정의가 미래를 창조한다

- 위기시대를 위한 평화정치와 창조윤리

유르겐 몰트만 지음, 안명옥 옮김, 분도소책자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