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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와 약자

읽점 2010. 1. 4. 14:33

2010년 1월호 도시락 - 연필

강자와 약자

오호, 놀라운 발견.

좌담회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녹음한 파일을 다시 들으며 타이핑을 한다. 역시 말과 글은 달라서, 말할 때는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글로 옮기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나는 전체적으로 발언을 많이 하지 않았다. 원래 기록을 맡았기 때문인데 오기로 한 패널이 못 오게 되어 일정 부분 패널 역할을 한 것이다. 가장 말을 많이 한 사람은 나이와 연차가 꽤 있는 남자 패널. 다른 사람이 얘기할 때 허리를 잘라먹고 들어와서는 큰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말한다. 하지만 논리적이거나 완성도 있는 문장은 아니다. 문장성분이 뒤죽박죽이기 일쑤요, 주어부만 몇 개째 나오다가 술어부는 흐지부지되어버려 말이 되게 만들려면 내가 작문을 해야 할 판이다. 가장 어린 여자 패널은 말한 횟수도 적고 발언 길이도 짧다. 주저주저하면서 모호하게 불분명한 문장을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발언을 나름대로 해석해 자기 이야기로 삼아버린다. 이 친구가 원래 하려던 말은 저런 내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 느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가 한참씩 뜨는 느긋한 여자 패널 역시, 자기주장을 충분히 펴지 못한다. 단편적인 문장이나 단어를 던져 이야기를 시작하면 바로 받아서 좌담을 빨리빨리 진행해버리는 남자 패널들.

좌담회를 할 때는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남자 패널들이 똑똑하기까지 해서 대화를 주도하는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들이 대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목소리로 끝까지 우기기, 권위로 제압하기, 못 들은 척하기, 빨리빨리 몰아세우기 등의 대화 스킬 덕분이었다. 아, 아니, 그들이 일부러 그렇게 못되게 군 건 아니다. 그들은 성실하게 좌담회에 임했다. 그 스킬들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그냥 그들에게 익숙한 대화 습관이었다.

 

한국사회에서 통하는 무기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일단 점수를 먹고 들어간다. 직책이나 지위가 높으면 그 권위도 아주 유용하다. 배경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을 때는 목소리 큰 사람이 바득바득 우기면 이기는 걸로 알려져 있다. 과정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고 결과가 좋으면 다 무마되는 분위기는 흔히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좋은 결과란 흔히 수적, 양적 증가로 드러난다고 받아들여진다.

한국의 많은 조직에서, 관리자나 책임자급은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남자들이 맡고 행정이나 실무, 잡무는 (상대적으로) 젊은 여자들이 많이 맡고 있다. 나이와 연차가 비슷한 남녀 구성원 사이에서는 남자가 책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조직에서 잘 살아남아 책임도 생기고 연차도 쌓인 남자들은 장기적으로 그 바닥에 남게 된다. 여자들은 똑같이 일하지만 비전을 나누거나 책임을 맡겨주지 않는 조직에서 어느 한계에 다다르면 탈진하고 만다. 여자 구성원들에게만 적용되는 조직 내의 유리천장 때문에, 지속적 장기적 성장이 가능한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낮은 연차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구성원이 바뀌는 것이다. 여기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지만, 한국사회가 여자들에게 책임 맡기기를 그다지 기꺼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으이구, 저 마초들..

한국사회에서 통하는 무기들을 갖고 있으며 잘 활용하는 남자들을 만날 때면 솔직히 '으이구, 저 마초들..' 이런 생각이 든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마초는 "스페인어 machismo에서 온 명사로 지나친 남자다움을 이야기한다. 스페인어로 macho는 때때로 용기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마초의 범위는 다양하다. 좀 더 극적인 남자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남성으로의 권리가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여성들은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여 때때로 가정 폭력의 원인이 된다."] 우석훈 박사는 한국 남성 80% 이상 혹은 거의 전부가 마초라고 단언했는데, 나도 대략 그런 느낌이다. 아, 아니, 한국 남성 거의 전부가 '나쁜 놈들'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남자들은(어쩌면 여자들도) 그렇게 '마초적으로' 자라왔다. 그래서, 좌담회 정리를 하면서 내가 발견했듯이, 마초적 언어습관과 행동습관이 철저하게 몸에 밴 것이다.

 

강자와 약자

"어쨌거나 남자들이, 손윗사람이, 관리자급이, 좀더 가진 자가 강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라는 나의 질문에 남자들, 손윗사람, 관리자급, 좀더 안정적 재정 기반을 확보한 이들은 다소 불편해하는 듯했다. 그들은 오히려 "내가 언제 약자를 괴롭히고 약탈했느냐, 내가 뭘 그렇게 많이 누리고 있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때 알았다. 자신이 '강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곧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고 비난을 들어야 하는 자리에 선다는 의미라는 것을. 내가 '약자'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들을 비난하겠다는 싸인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로마서 15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 우리 가운데 믿음이 강건한 사람들은, 약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다가가 손 내밀어 도와야 합니다. 그저 자기 편한 대로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힘은 섬기라고 있는 것이지, 지위를 즐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물으며, 주변 사람들의 유익을 도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자기 편한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어려움 속으로 직접 뛰어드셔서 그들을 건져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내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짊어졌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오래전에 쓰여진 말씀이지만, 여러분은 그 말씀이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해 쓰여진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품—한결같고 변치 않는 부르심과 따뜻하고 인격적인 권면—이 또한 우리의 성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늘 그분이 하시는 일에 깨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미더우시고 한결같으시며 따뜻하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성숙을 길러주셔서, 예수께서 우리 모두와 그러하시듯, 여러분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합창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 소리뿐 아니라 우리 삶이 다 함께 어우러져서, 우리 주 예수의 하나님이시자 아버지이신 분께 우렁찬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

- 로마서 15장 1-6절(메시지)

 

하나님은 왜 우리를 모두 평균하게, 각자가 모두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게 만들지 않으셨을까? 왜 누구는 항상 다른 사람을 의지해야 하고 또 누구는 항상 다른 사람을 넉넉히 돕게끔, 누구는 약하고 누구는 강하게 만들어놓으셨을까? 로마서 15장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가 서로 다르게, 강자와 약자로 지어진 이유는, 힘과 능력을 가진 자들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짊어짐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평균하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함께 누리고, 그로써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익혀 성숙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럼 나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하나님은 나를 믿음이 강건한 자로 세워주셨고, 내면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다듬어주셨고, 직장에서 연차도 꽤 있고 나이도 꽤 있고 나름 책임도 있는 자리에 있게 하셨고, (내 주변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재정상황을 허락하셨다. 어떤 이들에게 나는 아직 애송이며 신앙생활도 제멋대로요, 인격도 고급하지 않으며, 재력이 있거나 지위가 높지도 않고 남자도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의 내가 이미 충분히 강자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 성경은 자기 편한 대로만 살지 말고 "늘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물으며, 주변 사람들의 유익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강자가 되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진정한 강자로서, 비난받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을 내밀고 자기 자신을 나누셨다.

 

한국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강자로 살아가기

약자들의 어려움과 불편을 개선하는 데는 강자들의 이해와 배려와 협조가 중요하다. 사회의 주류 및 결정권자들이 약자들의 작고 힘없는 무력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덮어버리려 하면, 약자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을 쓰고 인상을 구겨가며 과격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럴수록 약자들에 대한 반감은 커지고 그들의 불편사항은 개선될 가능성이 낮아진다. 그들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소외될 것이다.

이것을 막을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강자들이 아닐까. 약자의 불편을 헤아리고 그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영적 감수성을 지닌 강자들이 큰 목소리와 힘과 돈으로, 약자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들을 배려한 결정을 해나간다면, 강자이신 예수께서 엉망진창으로 약자인 우리 모두와 그러하시듯, 우리 안의 강자와 약자도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 강자들과 약자들은 합창대가 되어 우리 목소리와 우리 삶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우렁찬 찬송을 부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