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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하나님의 미래계획
우주의 미래에 대해
선택1 : 진화론적 낙관주의
(당시) 사람들은 인류와 세계가 멈출 수 없는 내재적 과정으로써 앞으로 위로 행진해가고 있으며, 그 결과 곧 위대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148)
... 진화론자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은 문제들을 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유대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보의 신화가 실패하는 이유는 사실상 그것이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결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 십자가는 악에 대한 하나님이ㅡ 부정인데 그 부정 다음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긍정이 열린다. ... 악은 빛으로 향해 가는 단순한 상향 운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궁지에 빠진 인류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어둠 가운데로 내려가신 사건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다. (154)
선택2 : 이동하는 영혼
우리가 무언가 아주 다른 것, 즉 시간-공간-물질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니라 순전한 영적 존재가 사는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그러한 영적 존재인 우리는 기쁘게 이 세상의 족쇄를 단번에 벗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필멸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부패하여 죽는 것, 즉 우리의 물질적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156)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 이 세상에는 원래 이곳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특정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이 빛의 자녀들은 마치 유성처럼, 현재는 천한 물질적 육체 안에 숨겨져 있는 아주 작은 빛같은 존재지만 그들이 일단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나면 이 '지식'[헬라어로 '그노시스'(gnosis)]이 그들을 영적 실존으로 들어가게 해줄 것이다. ... 이 관점에 의하면 진짜 악인 물질을 만들어낸 창조 자체가 '타락'이 된다. 이 관점이 기독교의 몇몇 측면들을 얼마나 비슷하게 모방하는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기독교와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기 바란다. (157)
... 물질주의적 낙관주의를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든 영지주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158)
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
인간의 창조가 그 창조의 정점을 이루는데, 그 정점은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다. 인간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자신을 다시 반영해드리고, 청지기 됨을 통해서 나머지 창조계에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다. (163)
악은 피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세계를 만드신 하나님 대신에 그 자연 세계의 어떤 부분들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반항적 우상 숭배에 있다. ...... 그 결과 선한 창조의 자연스런 변화의 일부였던 죽음(cf. 170 ! )이 두 번째 영역을 얻게 되는데, 성경은 그것을 때로 '영적 죽음'이라고 부른다. 창세기에서, 그리고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죽음이 갖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유배다. (164)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등을 돌리는 행위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을 향해 서는 것이다. (164)
구속의 요점은, 있는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속박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165)
골로새서 1:15-20 ... '우주적 기독론' ... 선한 창조계가 지혜로운 창조주와 다시 조화를 이루게 되는 행위로써 십자가.. (166)
구속은 창조계를 손상시키고 왜곡시키는 악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167)
바로, 왕이 존재하는 모든 적을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설립하는 이미지다.
바울은 우주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복종할 때까지 예수님이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아버지는 그 다스림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 이 우주 전체에 있는 모든 세력, 모든 권위가 메시아에게 굴복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죽음 그 자체가 자신의 권력을 내놓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우주의 항시적인 상태라고 간주하고 싶은 것들ㅡ엔트로피, 위협적인 혼돈 그리고 붕괴ㅡ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시는 메시아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169)
죽음은 선한 창조의 선한 일부가 아니라 최후의 적이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로 높임받기 위해서는 죽음이 반드시 패배당해야만 한다. (170)
따라서 바울이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이 생이 끝난 후에 천국에 가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구원자, 주, 왕이신 예수님ㅡ물론 이것은 전부 왕에 대한 호칭이다ㅡ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와서 사람들의 현재 상황과 상태를 바꿀 것이라는 의미다. (171)
악에 대한 그리고 특히 죽음에 대한 최종적 승리가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는 순간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과 공모하는 것이며, 죽음 자체와 공모하는 것이다. (172)
우주의 미래에 대해
선택1 : 진화론적 낙관주의
(당시) 사람들은 인류와 세계가 멈출 수 없는 내재적 과정으로써 앞으로 위로 행진해가고 있으며, 그 결과 곧 위대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148)
... 진화론자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은 문제들을 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유대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보의 신화가 실패하는 이유는 사실상 그것이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결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 십자가는 악에 대한 하나님이ㅡ 부정인데 그 부정 다음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긍정이 열린다. ... 악은 빛으로 향해 가는 단순한 상향 운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궁지에 빠진 인류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어둠 가운데로 내려가신 사건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다. (154)
선택2 : 이동하는 영혼
우리가 무언가 아주 다른 것, 즉 시간-공간-물질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니라 순전한 영적 존재가 사는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그러한 영적 존재인 우리는 기쁘게 이 세상의 족쇄를 단번에 벗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필멸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부패하여 죽는 것, 즉 우리의 물질적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156)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 이 세상에는 원래 이곳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특정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이 빛의 자녀들은 마치 유성처럼, 현재는 천한 물질적 육체 안에 숨겨져 있는 아주 작은 빛같은 존재지만 그들이 일단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나면 이 '지식'[헬라어로 '그노시스'(gnosis)]이 그들을 영적 실존으로 들어가게 해줄 것이다. ... 이 관점에 의하면 진짜 악인 물질을 만들어낸 창조 자체가 '타락'이 된다. 이 관점이 기독교의 몇몇 측면들을 얼마나 비슷하게 모방하는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기독교와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기 바란다. (157)
... 물질주의적 낙관주의를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든 영지주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158)
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
인간의 창조가 그 창조의 정점을 이루는데, 그 정점은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다. 인간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자신을 다시 반영해드리고, 청지기 됨을 통해서 나머지 창조계에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다. (163)
악은 피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세계를 만드신 하나님 대신에 그 자연 세계의 어떤 부분들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반항적 우상 숭배에 있다. ...... 그 결과 선한 창조의 자연스런 변화의 일부였던 죽음(cf. 170 ! )이 두 번째 영역을 얻게 되는데, 성경은 그것을 때로 '영적 죽음'이라고 부른다. 창세기에서, 그리고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죽음이 갖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유배다. (164)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등을 돌리는 행위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을 향해 서는 것이다. (164)
구속의 요점은, 있는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속박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165)
골로새서 1:15-20 ... '우주적 기독론' ... 선한 창조계가 지혜로운 창조주와 다시 조화를 이루게 되는 행위로써 십자가.. (166)
구속은 창조계를 손상시키고 왜곡시키는 악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167)
바로, 왕이 존재하는 모든 적을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설립하는 이미지다.
바울은 우주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복종할 때까지 예수님이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아버지는 그 다스림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 이 우주 전체에 있는 모든 세력, 모든 권위가 메시아에게 굴복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죽음 그 자체가 자신의 권력을 내놓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우주의 항시적인 상태라고 간주하고 싶은 것들ㅡ엔트로피, 위협적인 혼돈 그리고 붕괴ㅡ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시는 메시아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169)
죽음은 선한 창조의 선한 일부가 아니라 최후의 적이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로 높임받기 위해서는 죽음이 반드시 패배당해야만 한다. (170)
따라서 바울이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이 생이 끝난 후에 천국에 가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구원자, 주, 왕이신 예수님ㅡ물론 이것은 전부 왕에 대한 호칭이다ㅡ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와서 사람들의 현재 상황과 상태를 바꿀 것이라는 의미다. (171)
악에 대한 그리고 특히 죽음에 대한 최종적 승리가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는 순간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과 공모하는 것이며, 죽음 자체와 공모하는 것이다. (172)
창조가 사랑의 행위였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의 창조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창조하고 난 후에 그 사랑은 창조계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고 섭리와 지혜로 그것을 보존할 뿐 제압하지는 않는다. 논리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논리는 더 불리할 수밖에 없다. ...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173)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넘쳐나고, 흠뻑 젖도록 고안되었다. (174)
이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불완전하다. 언젠가 반항의 모든 세력이 패배당하고 나면 그리고 창조계가 그 창조주의 사랑에 자유롭게 그리고 기쁘게 반응하게 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 그 세계를 채워서 그것이 하나님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로 머무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넘쳐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인데 자유롭게 주는 사랑은 자유롭게 되돌아오는 사랑을 위한 배경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순환하면서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연합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축하하며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174)
진정한 인간 존재, 하나님 자신의 형상, 하나님의 성육신한 아들이 와서 인류를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이끌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한편 창조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받을 때까지, 즉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의 모든 백성에게 일어날 때까지는 무익함과 변화무쌍과 부패에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175)
이것은 경련과 수축 그리고 어머니와 자식이 분리되어 두 개의 존재가 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포함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 옛 창조의 자궁으로부터 새 창조가 격렬하고도 극적으로 탄생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준다. (176)
하늘과 땅은 ....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합쳐지고 나면,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축하하고 즐거워할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창조계의 징표이며, 창조계 안의 양극은 경쟁이 아니라 연합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징표다. (178)
창조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유기 혹은 진화가 아니라 구속과 회복이며, 그 두 가지는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약속되고 보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온 세상이 기다리는 것이다. (181)
사실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믿음은 때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지 기독교 신앙에 이상하게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핵심적이고 중요한 특징으로써 그것이 없으면 온갖 다른 것들이 다 잘못되어 버린다... (184)
그 이유는 승천이 우리에게 이 우주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가 교회와 구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85)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어느 궁극적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그리고 하늘뿐만 아니라 땅도 '지휘하고' 계시다는 생각에도 적용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콧방귀를 뀌며 반감을 나타낼 것이다. 그분이 지휘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혹은 지휘하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망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점을 벗어나는 말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이 여전히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다국적 기업을 대표하는 전령사처럼, 새로운 최고 경영자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소명을 통해 이 새로운 통치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발견했다. (187)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서로 일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받은 교회가, 연약한 상태로, 고난받으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오해받으며, 오판받으며, 정당성을 입증받으며, 축하하며 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임할 것이다. (187)
교회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승천의 진리를 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참으로 함께하시는 분이 동시에 이상하게 부재하시고, 이상하게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고, 이상하게 우리와는 대조되는 주님, 즉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우리는 텅 빈 승리주의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얄팍한 절망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역으로 예수님이 우리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셔서 이미 합당한 주로서 이 반란의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붙잡고 축하할 때에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승천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현재에도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서 하시는 일을 붙잡고 축하할 때에만 우리는 세계 역사에 대한 잘못된 관점으로부터 구출될 것이고, 현재에 이루어야 하는 정의의 임무를 맡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189)
승천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씨름을 포기하고.... 피조물로서ㅡ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이지만 여전히 피조물인ㅡ우리의 지위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190)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 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은 인간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금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보다도 우선이다. (191)
우리에게는 새롭고 더 나은 우주론이 필요하다. (191)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하는데, ..... 언젠가 그 둘은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 합쳐질 것이고, 서로에게 열려 있고 서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영원히 결합하게 될 것이다. (193)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해결하시고 그저 안도의 한숨만 이끌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들판에서 바다와 홍수에서 기쁨의 외침을 이끌어내실 것이라는 뜻이다. (200)
종말론은 대부분의 1세기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하게 믿었던 내용, 즉 하나님의 인도 하에 이 역사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가는 방향은 정의, 치유 그리고 희망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라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 '종말론'이라는 단어를 쓸 때 ...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이며 그 미래가 이미 현재에 우리를 만나러 오기 시작했다는 믿음이다. (202)
잠시 떠나면서 종이나 하인에게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의 돈을 가지고 장사하도록 하는 왕 혹은 주인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 ...
(207)
헬라어 '파루시아'(parousia) - '오다' '현존' 즉 '부재'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현존' (210)
바울과 초대교회이 모든 사람이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자. 첫 번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예배하는 예수님이 영으로는 가까이 계시지만 몸으로는 부재하시는데 언젠가는 몸으로도 현존하실 것이고 그때에는 자신들을 포함해서 온 세상이 그 현존의 갑작스런 변화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하자. 이러한 말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단어가 바로 '파루시아'다.
두번째로 .... 카이사르가 (보통은 부재하지만 통치는 하고 있는 황제가 직접 나타나서 통치하는 경우와 같이) 언젠가 빌립보나 데살로니가나 고린도를 방문할 수도 있는 것처럼, 부재하시지만 통치하시는 이 세상의 주님이 언젠가 이 세상에 직접 나타나 통치하시게 되고 그 결과로 온갖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하자. .. (212)
주의 날, 야훼의 날....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적을 물리치시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출하시는 날이다. (213)
바울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의 요점은, 대중적인 휴거 신학과는 달리 구원받은 신자들이 땅으로부터 떨어진 공중 어딘가에서 그냥 머문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의 요점은 돌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러 나갔다가 그분의 땅으로, 즉 자신들이 처음 출발했던 그 장소로 왕이신 주님을 호위해 온다는 것이다. ...... 하늘의 시민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황제가 모국으로부터 와서 식민지에 온전한 위엄을 부여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구출이 필요하다면 구출해 주고, 현지의 적들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바로잡아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217)
예수님은 현재 하늘에 계시다. 그러나 ... 이 하늘은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우리 세계의 공간에 속한 어떤 장소가 아니라 비록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공간이다. ... 하늘과 딸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가 될 그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이고, 우리가 그분 앞에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자신의 참 정체성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다. (219-220)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ㅡ'땅'ㅡ와는 다르지만 수많은 방식으로 서로 교차되어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인 자신의 내적 삶에서 교차된다. 언젠가는 이 두 개의 세계가 완전하게 통합되어 서로를 온전히 다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바울과 요한이 이야기하는 그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220)
셩경에 근거한 같은 전통에 의하면 그분이 오실 때 그는 특별한 역할을 하실 터인데, 바로 심판관의 역할이다. (222)
(다니엘서 7장) 인자에게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지배권과 권위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들을 다스릴 권위가 주어지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의도적인 장치다. (225)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이라는 그림은 사실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는 바울 신학의 기초다. (226)
믿음에 의한칭 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게 될 미래의 판결을 예견하면서 현재에 일어나는 일이다. (227)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모든 이의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심판자이신 그분을 지금 여기에서 대면한다는 듯이다. (229)
예수님은 현재 이 세상과 맞서고 계시며, 나중에는 직접 나타나서 맞서실 것이다. 그분의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바로 그분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될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전자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후자의 일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분이 나타나신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를 거절하는 이원론도 아니고 마치 우주인처럼 이 세상으로 그분이 그냥 들어오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포함한 현 세상의 변화이며, 그것을 통해 드디어 이 세상이 바로잡히고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죽음과 부패 자체가 극복될 것이고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실 것이다. (230)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과 나타남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즉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지만 아직은 그분의 최종적 오심과 현존을 기다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겸손하면서 동시에 제대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231)
... 이러한 이유로 승천과 '파루시아' 사이에서 교회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동력의 에너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기는 한다. 우리가 승천하신 주님께 순종하면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현재에 하는 모든 일은 그분이 나타나실 때에 향상될 것이고 변화될 것이다. (231-232)
하나님의 백성은 새로운 형태의 육체적 존재, 즉 현재 우리의 육체적 삶의 완성과 구속을 약속받았다... (235)
'낙원'은 오랫동안 잘못 해석되어온 단어인데, 그것은 최종적 종착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다른 유대교 저작에서처럼 죽은 자들이 새로운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원기를 회복하게 되는 복된 동산, 쉼과 평온의 공원을 의미한다. (240)
'부활'은 ....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을 일컫는 말이었다. (241)
하나님이 미래에 주실 유산, 부패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과 그 세계에서 살 새로운 육체는 이미 안전하게 보관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천국으로 가서 새로운 육체를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러니까 .. 회복된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태어나기 위해 천국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242)
C.S.루이스의 놀라운 책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그는 우리의 현재 육체보다 더 견고하고, 더 실재적이고, 더 실질적인 육체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53, 난 정말이지 C.S.루이스의 소설책들이 너무나 좋다. 특히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천국에 대한 그의 묘사는 상당히 설득력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잇는 것은, 그분의 상처가 고통과 죽음의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승리의 표시로서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부활한 육체도 하나님의 특정한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충성의 표시를 적절하게 지니게 될 것이고, 그 표시에는 분명 우리가 고통받은 흔적도 같이 있을 것이라는 점뿐이다. (254)
부활은 현재 우리가 복음을 위해 열심히 하는 일이 낭비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그 일은 완성될 것이며, 성취될 것이다. (257)
심판ㅡ선하고 지지해야 하고 정당성을 입증받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고, 악하고 정죄받아야 하는 것은 저런 것이라는 주권적 선언ㅡ은 혼돈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280)
'포용'이 있으려면 먼전 '배제'가 있어야만 한다. 악이 규명되고 해결되어야만 화합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기초 위에서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리와 화합을 위한 위원회'라는 놀라운 일을 해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악하게 행동한 자들이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화합도 포용도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결국에는 이 세상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이 교리는 부활의 교리처럼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선하시다는 믿음에 의해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로잡는 행위에는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물을 왜곡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철조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철좡에 의존해서 산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는 자리가 없을 것이다. (281)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바치고 그것을 예배하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서서히 반영하지 않게 된다. 인간 삶의 제1법칙 중 하나는 자신이 예배하는 그 대상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예배하는 그 대상을 반영하게 된다. 그러한 반영은 그 대상 자체에게뿐만 아니라 주변 세상으로까지 확대된다. (285)
나는 인간이 그러한 길로 계속해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복음, 진정한 빛의 모든 영광,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라고 하는 모든 암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모든 이정표들을 계속 거부한 나머지, 죽은 후에는 자기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국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존재, 신의 형상을 더이상 지니고 있지 않은 피조물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285-286)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계를 구속하시고 회복하실 것인지, 그리고 모든 것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그 과정의 일부로서 인간들도 구원하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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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길다. 2부는 분량도 많고 내용도 아주 굵직굵직하고 중요한 것들이 많다.
읽고 나서는 매우 선명하고 간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옮겨놓고 나니 어마어마하다.
소제목만 훑어봐도 승천, 재림, 천국, 새 창조, 심판, 연옥, 낙원, 지옥...
2부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진화론적 낙관주의나 이원론적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역동적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 심판, 회복, 새하늘 새땅 때문이다.
파루시아,라는 단어. 오심, 나타남, 드러남, 왕의 현존...이라는 의미를 갖는.
얄팍한 절망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톰 라이트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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