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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예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듣고 그의 생애와 가르침,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사실들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예수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결론 내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예수의 이야기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가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일부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언가 아주 중요하고 위대한 것을 다루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예수를 진심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중에서도 개인적 취향에 따라, 그를 역사의 기원이 되는 붓다나 모세, 소크라테스, 모하메드와 동일한 선상에 두는 것 같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중심은 아니며, 그의 명성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지만 독보적이지는 아니다.
골로새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또는 그들 중 일부는 이런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우주적 세력들은 예수와 동일한 서열을 차지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메시아인 예수를 그들 삶의 중심에 되돌려 놓을 것을 권면한다.
바울이 그의 논지를 펼쳐가는 방식은 그의 논지만큼이나 주목할 만하다. 예수의 유일성(uniqueness)에 대한 주장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그러한 주장들은 종종, 예수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만함을 지니고 있었다. 때로 그러한 주장들은 폭력적으로 강요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홀로 유일하게 창조와 구속 사역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면서도 그의 주장은 오만하지 않다. 또한 그는 결코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는 뿌리 깊은 겸손(humility)의 자세로 논지를 펼쳐간다. 그는 가장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랑의 힘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들이 바울 자신이 그렇듯이 명민하고 타협하지 않는 지성과 온화하고 놀라울 정도로 친절한 가슴의 결합을 이루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He exhibits again what Christians have come to appreciate so much in Paul-the wedding of a brilliant and uncompromising intellect with a heart that is warmly and wonderfully kind.)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마르바 던의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를 읽고 있는데, 요즘 묵상하고 있는 골로새서와 같은 맥락이다.
이러저러한 우주적 세력은 cosmic forces of one sort or another인데,
[세상 권세~]에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 권세~]의 1장에서는 '정사와 권세'(the principalities and powers)라는 개념을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 나오는 '권세'를, 마귀 혹은 인격적 존재로 보거나 사회적 제도나 구조로 생각한다. "역사의 딜레마이며 인간 곤경의 원인인 정말로 비극적인 힘", 우주, 곧 '코스모스'(kosmos)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둠의 권세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이 '우주적 권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현대의 용어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들은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건과 구조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국가, 경제, 미디어,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우주적 권세들이 이용하는 도구다. - 존 요더, (세상권세와 하나님의 교회, 23쪽)
이 책에서 성경을 통해 고찰한 권세는 인격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물질적이거나 영적이거나의 경계가 모호하며 매우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고, 권세 역시 피조물로서, 타락한 권세는 십자가 사건을 통과하여 변혁(transformation)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주제가 함께 나타난다.
... 비록 십자가에서 권세에 대한 결정적 승리가 이루어졌지만, 권세와의 전투는 당분간 계속되어야만 한다. 권세가 그 속박을 풀어버리려고 사납게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영적 전투) ... 정사와 권세의 통치권은 깨어졌고,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교회(Church)의 과업이다. 권세의 움직임은 제한되었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교회(Church)의 임무다. 권세의 통치권이 깨어지고 그 움직임이 제한된 것은 권세가 궁극적으로 제압될 것에 대한 표지이며, 교회(Church)는 그런 표지를 경축하는 장소다.
... 존 요더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공동체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구조가 되어 다른 구조들이 그 공동체를 통해 변화될 것이며, 그 변화의 패턴은 "혁명적 종속"을 통한 "창조적 변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권세는 파괴되지도 않을 것이고, "기독교화"되지도 않을 것이며, "길들여진" 존재가 될 것이다.
... 그는 권세가 지배구조로 등장하며 사람들을 새로운 노예상태로 종속시킨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한 가지 과업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교회는 권세들이 다시 굴레를 씌워야 하는 달아난 말과 같음을 인식한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 그들의 가면은 벗겨졌고, 반(半) 신적인 지위를 빼앗겼으며,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과 일의 수준까지 강등되었다. ...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대해, 생각 없이 헌신하거나 그 안에서 단순히 식물처럼 살아가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어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찾으며 소망의 복음을 항상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의 독특한 메시지는, 유일한 소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권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권세를 무릎꿇게 하려는 노력도, 권세와 협력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섬김의 도(servanthood)이다. 이러한 섬김의 도는 다음 과제들을 포함한다.
- 권세에게 복종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함
- 구조를 향해 예언자적으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함
- 구조의 변혁에 참여함
- 가능하다면 대항 구조(conter-sturctures)를 제시함
-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구조를 무장해제함
- 권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잡음
*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자신의 삶에서 권세와 싸움을 벌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사 때문임을 분명히 언급해야만 한다.
참된 교회(Church)는 이런 파괴적인 세력과의 싸움에 대해 깨어 있는 공동체이며, 또한 자신이 주님이 능력을 힘입어 그 세력을 정복하거나 적어도 불구로 만들 수 있음을 아는 공동체다.
아담스가 성경시대의 권세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내용은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일곱가지 사회악을 떠올리게 한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도덕 없는 상거래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예배
... 권세가 스스로 생명과 통합성(integrity)을 가진 피조물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우리는 각 권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 생명에 봉사하라는 소명(vocation)을 성취하고 있는지 각 권세를 향해 물을 수 있다.
마르바 던의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는 정말 훌륭한 책이다. 아직 절반 정도 읽었지만. 매우 강력하다.
너무 어렵지만, 아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꾸역꾸역 읽다보면 희미하게 감을 잡게도 되고, 아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흥이 나다가, 회개와 순종의 문제가 나와서 다음 장을 못 넘기고 무릎꿇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다음의 더 강력한 이야기들을 읽어나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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